청소년에 대해 흥미를 가짐

내가 앞서 말하였지만 지금 다시 말하고 싶다. 만일 여러분이 청소년을 돕고 싶다면 그들에 대해 흥미가 있어야 한다. 이전에 나는 사오십 대의 형제 자매들이 있는 교회에 간 일이 있었다. 그들 중 누구도 청소년에 대하여 좋은 말을 하지 않았다. 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했다. “이 형제님, 우리의 청소년을 좀 보십시오. 저들이 합당합니까? 저들은 나이든 사람과 젊은 사람을 구별할 줄도 모른답니다. 저들은 길에서 우리를 만나도 본 체도 하지 않습니다. 집회소 입구에서 우리를 보면 빤히 쳐다보기만 한답니다. 이 형제님, 이 청소년들이 나이든 사람과 젊은 사람을 구별할 줄 알도록 그들에게 필요한 말씀을 전해 주셔야 합니다.” 또 한번은 오십 대의 한 형제가 나에게 와서 이렇게 말했다. “이 형제님, 우리의 청소년들을 보십시오. 그들은 너무나 버릇이 없습니다. 걸을 때 걸음걸이가 날아가는 것 같고 눈을 두리번 거립니다. 그들은 참으로 정신이 없습니다.” 얼마 후 내가 나이든 형제들과 함께 있을 때, 한 형제가 청소년에게 복종을 가르치는 메시지를 전해 달라고 요청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의 청소년은 나이든 사람들에게 전혀 복종하지 않아요.“ 그날 나는 그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형제님들, 여러분은 나에게 여러 차례 청소년들이 아주 나쁘다고 말했습니다. 제가 여러분에게 묻겠습니다. 만일 청소년들이 올바르다면 여러분과 같은 나이 많은 사람들이 무슨 필요가 있겠습니까? 분명 그들은 틀렸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그들에게 무슨 본을 보이셨습니까?“ 나는 그날 그들에게 청소년을 돕도록 격려하고 청소년에 대한 힝미를 갖게 하기 위하여 상당히 많이 말했다. 그들의 결점을 먼저 찾지 말라. 그렇게 한다면 그들을 도울 수 없다.

어떤 사람들은 좋다고 여기는 청소년만을 선호하고 좋지 않다고 여기는 청소년들에게는 입을 다물고 머리를 흔든다. 이것은 틀린 것이다. 하나님은 자주 여러분이 좋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 대한 여러분의 평가가 정확하지 않다는 것을 보여 주신다. 오히려여러분이 좋지 않다고 여기던 사람들이 하나님께 크게 쓰임 받을 수 있다. 그러므로 지금 우리가 좋다고 여기는 사람들이 장래에도 좋을 것이라거나 지금 우리가 나쁘다고 여기는 사람들이 장래에도 나쁠 것이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우리는 결코 자신의 판단을 신뢰해서는 안된다. 이것은 우리 자신을 평가할 때도 마찬가지이다. 오늘 우리가 좋을지 모르나 이것은 우리가 끝까지 좋으리라는 것을 보장하지 못한다. 오늘 우리가 나쁠지 모르나 주님은 내일 우리를 좋게 만드실 수 있다. 마찬가지로 청소년이 좋건 나쁘건 우리는 모든 사람을 동일하게 대해야 하며 그들을 좋아하고 관심해야 한다. 그들이 날아다니는 것처럼 걷는가? 그러면 여러분은 그들과 같이 날아 다녀라. 그들의 눈이 두리번거리는가? 여러분의 눈도 두리번 거려라. 그들이 공놀이를 하는가? 그들과함께 놀이를 하고서 놀이가 끝나면 그들에게 주 예수님에 대하여 말하라. 이것이 참된 역량이다. 그러나 공놀이를 하고 난 뒤 주예수님이 사라져서 그들과 주님에 대하여 대화할 수 없다면 여러분의 영성은 거짓된 것이다.

다른 예를 들어 보겠다. 여러분이 길에서 청소년을 만났다고 하자. 그에게 어디에 가는 길이냐고 물으면 그는, “나는 너무 지겨워서 극장에 가는 중이에요”라고 말할지 모른다. 그럴 때 엄숙한 얼굴을 하고서, “왜 영화를 보러 가느냐? 어떻게 그럴 수가 있단 말이냐?”라고 그를 책망하지 말라. 만일 여러분이 이렇게 한다면 여러분은 결코 이 젊은이를 도울 수 없을 것이다. 그와 잠시 대화를 하는 것이 좋다. 그에게 어느 극장에 가서 어떤 영화를 볼 것이냐고 물어보라. 그리고 그와 함께 잠시 걷거나 택시를 함께 타고 가라. 극장에 가는 동안 여러분의 마음에 있던 몇 가지를 그와 이야기 할 수 있다. 여러분은 그에게 이렇게 질문할 수 있다. “형제, 지난 몇 일 동안 말씀 읽기를 누린 적이 있어?”이런 식으로 그와 성경 읽기에 대하여 대화를 시작할 수 있다. 여러분은 또한 기도에 대해 이야기 할 수 있고 그에게 최근에 기도할 일이 있느냐고 물어볼 수 있다. 극장에 도착하면 여러분은 그에게 이렇게 말할 수 있다. “형제, 이제 다 왔군. 너는 들어가. 내가 택시 값을 내줄게. 나는 집회에 가야해. 영화가 끝나기 십 분 전에 다시 돌아와서 너를 기다리고 있을게.” 그에게 화를 내는 대신 여러분은 그에게 큰 흥미를 갖는 것이다. 여러분에게 돈이 있다면 그에게 이렇게 말할 수 있다. “형제, 입장권을 살 돈은 갖고 있어? 없으면 내가 사줄게.” 형제 자매들이여, 여러분이 이렇게 할 수 있다면 그를 인도하여 그를 인도할 수 있는지 없는지 보라. 나는 여러분이 그를 정죄할까 염려한다. 여러분에게 정죄를 받은 후에 그는 일생 동안 영화로부터 구출되지 못할 수도 있다. 그는 영화를 보지 않고서는 살 수 없게 될 수도 있다. 그가 남은 일생동안 영화를 보러가는 것은 당신이 그를 격동시켰기 때문일 것이다. 내가 터무니 없는 말을 하고 있다고 생각지 말라. 나는 내가 무엇을 말하는지 알고 있다. 주 예수께서 엠마오로 가시던 날에 이와 같이 행하셨다. 주님은 두 제자들에게, “너희가 길 가면서 서로 주고받고 하는 이야기가 무엇이냐?”라고 물으셨다.(눅24:17) 그들 중 한 사람이, “당신이 예루살렘에 체류하면서도 요즘 거기서 된 일을 혼자만 알지 못하느냐”라고 대답했다.(24:18) 물론 주님은 분명하셨지만 여전히 “무슨 일이냐?”라고 물으셨다. 그들은 길게 말했지만 주 예수님은 인내를 갖고 들으셨다. 그들이 내려가고 있었을 때 주님은 다만 그들과 함께 걸으셨다. 그러나 마침내 주님은 그들의 눈을 열어 주셨고 그들은 돌아섰다. 형제 자매들이여, 여러분은 모두 내가 무슨 뜻으로 이런 말을 하는지 알 것이다. 여러분은 청소년을 돕고자 하는가? 그러면 무어보다 먼저 여러분은 그들에게 흥미를 가져야 한다. 그들의 실패를 먼저 주의하지 말라. 결코 그들을 정죄하지 말라. 여러분은 그들에게 여러분이 그들의 좋은 친구이며, 여러분이 그들을 동정하며, 여러분이 그들과 그들의 일에 흥미를 갖고 있다는 느낌을 주어야 한다. 이것이 중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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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는 청년의 정욕을 피하고 순수한 마음으로 주님을 부르는 사람들과 함께 의와 믿음과 사랑과 화평을 추구하십시오. 딤후 2: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