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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 사함'과 '거듭남'은 어떻게 다른가?

 

 

첫째, 죄 사함 자체가 거듭남은 아니다.


죄 사함의 체험을 거듭남으로 착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둘은 다음과 같이 전혀 다르다. 먼저 죄 사함은 '예수의 피'로 인한 것이나 거듭남은 '생명 되신 예수님 자신'으로 인한 것이다. 죄 사함은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성취된 것이나 거듭남은 '그리스도의 부활'로 말미암는다. 죄 사함은 하나님과 구속 주 사이에 '사람 밖'에서 이뤄진 사건인 반면, 거듭남은 그 구속주가 부활 후 '사람 안'에 직접 들어오심으로 체험된다. 예표 상 죄 사함은 유월절 <어린양의 피>를 문설주에 바름으로 이뤄졌으나, 거듭남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집안에서 <어린양의 고기>를 먹음으로 체험된다. 로마서 5:10은 '(피로) 화목 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생명으로 구원을 얻으리라'고 말함으로 피로 인한 죄 사함과 생명으로 인한 구원과 구분하여 말한다. 이것을 법리적인 구속과 유기적인 구원이라고 구별하여 표현하기도 한다. 이처럼 죄 사함과 거듭남은 각기 다르다.


체험으로 볼 때 죄 사함은 물론 거듭남과 밀접한 연관이 있기는 하다. 그러나 속죄의 피로 인한 죄 사함과 부활 생명으로 인한 거듭남의 차이를 분명하게 인식하는 것은 거듭남 이후의 믿음 생활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정상적인 믿는 이의 생활은 '내가 아니요 내 안에서 그리스도가 사시는 것'(갈 2:20)이다.


그러나 체험에 의하면 과거에 가졌던 죄 사함의 확신만 가지고는 이런 승리의 생활은 잘 이뤄지지 않는다. 대신에 성경은 이러한 생활을 하려면 날마다 생명의 떡 이시요 생수이신 <주님 자신을 먹고 마실 것>을 요구한다(요 6:57, 고전 12:13, 요 4:14, 7:39, 빌 1:21, 고전 15:31, 롬 10:12-13, 빌 2:12). 또한 옛 사람을 부인하고 우리 안의 그리스도가 사심으로 말씀의 요구들을 이룰 것을 성경은 가르친다. 사실상 서신서 전체의 '...하라' 또는 '...하지 말라'는 말씀의 요구들은 보혈만으로는 부족하고 우리 안에 들어오신 주님 자신이 우리를 통해 사실 때만 지켜질 수 있다. 그러나 죄 사함 받은 사실이 이런 생활을 보장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죄 사함의 확신자가 주님 자신이 생명으로 우리 안에 들어오신 것인 참된 거듭남을 체험한 자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둘째, <영적 출생이 없으면> 거듭남이 아니다.


거듭나지 않은 사람도 얼마든지 신학 지식을 가질 수 있다. 심지어 열심 내어 하나님을 섬길 수도 있다. 다소의 사울이 그 좋은 예이다. 그는 명망 있던 가말리엘 문하에서 구약을 배웠다. 또한 그는 유대종교 중 가장 엄한 파를 좇아 바리새인의 생활을 했다. 그는 자신을 가리켜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였다고 했다. 그러한 그가 한 일은 열심 내어 교회를 핍박하고 유대교를 사수한 것이다.


그러나 훗날 그는 이것들을 다 배설물로 여긴다고 했다(빌 3:1-8). 심지어 그의 사역의 후반부에서 그는 자신의 과거의 이러한 일들을 '믿지 아니할 때 알지 못하고 행한 것이다'(딤전 1:13) 라고 고백했다. <믿지 아니할 때>라는 말을 눈여겨보아야 한다. 참되게 거듭나지 못했을 때 그렇게 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가 참되게 주님을 만난 이후 그는 자신을 부인하고 그리스도를 살았다(갈 2:20). 또한 하나님의 뜻을 따라 그리스도의 몸을 건축하는 길을 신실하게 갔다(고후 11:28, 골 1:28-29). 이처럼 그의 회심 전과 후의 삶은 극명하게 구별된다. 하나는 <거듭나지 않은 종교인>의 삶이었다면, 다른 하나는 <거듭난 주의 종>의 삶이었다.


셋째, <주님 자신>이 사람 안에 들어오심을 부인하면 거듭남이 아니다.


요일 5:12절은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 하나님의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다>(...he that hath not the Son of God, hath not life)라고 말한다. 이 말씀에 의하면 <아들 자신>의 내주가 거듭남과 직결된다. 그러나 <성령님>의 내주로 인해 우리가 생명을 얻었다고 말해도 위 말씀과 상치되지는 않는다. 삼위는 구별되나 분리되지 않으심으로 성령의 내주는 다른 두 위격들의 내주를 포함하기 때문이다. 총신대 신대원을 졸업한 박상걸 목사도 자신의 '성경적 구원론'(생명의 말씀사, 1995)에서 <구원받은 성도들 속에 성령이 임하신다는 것은 곧 삼위일체 하나님의 임재를 의미하기도 한다. 성경은 이르기를 성령과 더불어 하나님이 우리 속에 거하시므로...아울러 우리 속에 그리스도께서 계시며...>(131-132쪽)라고 말함으로 이 점을 뒷받침해 주고 있다.


그러나 장로교단 소속 비중 있는 신학자 중에는 <성령님이 아들을 대신하여 우리 안에 계심으로 아들 하나님 자신은 사람 안에 오실 필요가 없다>고 하는 사람이 있는 것 같다. 즉 아들 하나님의 사람 안의 내주하심을 적극 부인하는 경우이다. 그러나 이것은 지금까지 보아 온 성경이 계시하는 거듭남의 진리를 위협하는 매우 위험한 주장이다. 장차 목회자가 될 신학생들을 교육하는 중요한 위치에 있는 사람이 아래와 같이 주장하는 것은 매우 우려되는 일이다.


"성령의 내주는 곧 주 예수께서 내주 하시는 것과 조금도 다름이 없다. 성령의 내주로써 충분하기 때문에 주 예수께서 우리 속에 내주 하실 필요가 없다. 그는 재림 때까지 하나님 아버지의 우편에 계신다는 것이 사도신경이다"(월간 교회와 신앙, 2001년 10월 호, 122쪽).


이 외에도 '<하나님의 말씀>(벧전 1:23)이 우리 안에 들어온 것이지 <주님  자신>이 우리 안에 계신 것은 아니다' 라거나 '우리는 법적으로 하나님의 <양자>(엡 1:5)로 입적된 것이지 진짜 하나님의 생명이 우리 안에 들어와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이 아니다'는 주장들은 성경을 크게 오해한 잘못된 가르침들이다. 만일 누구든지 이처럼 <아들 하나님> 자신의 성도들 안의 내주를 적극적으로 부인하고 나선다면, 그는 참된 거듭남을 체험하지 못했을 가능성이 많다. 이런 사람들은 거듭남이 <생명의 씨이신 주님 자신>이 사람 안에 직접 '뿌려지는' 문제요(고전 15:45, 막 4:26-29), 위로부터의 <출생>의 문제(요 1:13하)임을 보지 못한 것이다.


위 세 가지 유형에 해당되는 사람들은 다음 성경 말씀을 깊이 묵상해 보기 바란다.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죄를 짓지 아니하나니 이는 <하나님의 씨>가 <그의 속에 거함>이요'(요일 3:9).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나니 이는...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니라'(요 1:12-13). '거룩하게 하시는 자(예수님)와 거룩하게 함을 입은 자들(거듭난 성도들)이 다 <하나에서 난지라> 그러므로 형제라 부르시기를 부끄러워 아니하시고'(히 2:11).


위 말씀들은 독생자이시면서 동시에 맏아들이신 예수님이 나신 그 동일한 근원에서 우리가 영적인 하나님의 자녀로 태어났음을 분명히 말하고 있다(행 13:33, 벧전 1:3). 그러므로 주 예수님도 피조물인 우리에게 '형제'라고 부르시기를 부끄러워 않으신다.


위와 같은 성경 말씀들에 기초하여, (지방)교회 측은 주님은 신격(데오테스, 2320)을 가지신 <하나님-사람>(God-man)이시고, 우리는 ‘이 분과 연합된 <하나님-사람들>(God-men)이되, 경배의 대상이 되는 신격은 없다.’라고 이해한다. 이것은 <주님은 포도나무시요 우리는 가지>(요 15:5), 또는 <주님은 그리스도의 몸의 머리이시요 우리는 그 몸의 지체들>(골 1:18, 고전 12:27)이라고 이해하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