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을 돌볼 부담을 취함
우리는 그분 앞에서 부담을 취할 수 있다. 부담을 취하기 위해 특별하게 기도할 필요는 없다. 우리가 취한 부담이 무엇이든 그것은 주님의 부담일 것이다. 우리는 사무적인 일들만을 먼저 관심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아마 집회에서 안내하는 것에 대한 부담을 취할 수도 있다. 그러나 안내하는 일 자체가 우리의 부담은 아니다. 그보다 우리의 부담은 안내함으로써 사람들을 돌보는 것이다. 이렇게 부담을 취하는 것은 아주 큰 차이를 가져온다. 우리가 주님에 의해 완전히 다룸을 받은 후 안내를 한다면 우리가 어디서 안내하든지 생명을 공급할 것이다. 우리에게서 다른 사람들의 영 안으로 생명이 흘러 들어갈 것이다. 성령은 항상 이러한 봉사를 존중하신다.
이러한 목적을 위하여 주님은 심지어 십대들도 필요로 하신다. 십대 후반의 청소년들은 중학생들을 돌보는 데 부담을 취하기 바란다. 나의 관찰에 따르면, 우리에게는 열 살, 열한 살, 열두 살의 자매들이 많지만 그들을 돌볼 수 있는 십대들이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러한 돌봄에 자신을 드릴 수 있는 몇몇 젊은 자매들이 필요하다. 새롭게 헌신하고 주님의 다룸을 받은 후에 그들은 이렇게 말하게 될 것이다. "주님, 저는 이 부담을 취합니다. 저 자신을 중학교 여학생들을 돌보는 데 드립니다. 이것이 저의 봉사입니다. 저는 그들을 얻어 새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 내내 그들을 짊어지고 갈 것입니다." 만약 몇몇 십대들이 이렇게 한다면 그들은 그들과 함께하시는 주님의 임재를 갖게 될 것이고 축복을 보게 될 것이다. 우리는 주님께서 이러한 청소년들과 함께 어떤 큰일을 이루실지 알 수 없다. 아마도 이러한 봉사를 통해 그들은 다음 세대에 주님의 회복 안에서 유용해질 것이다. 그들은 많은 어린 지체들에게 "큰 언니들"일 뿐만 아니라 어머니들이 될 것이다.
우리는 어떤 사람을 이 위치에 임명할 수 없다. 우리는 "자매님, 어린 소녀들을 돌보기 위해 오십시오."라고 말할 수 없다. 이것은 통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들이 주님께 가서 고백할 것이다. "주님, 제가 여기 있습니다. 저는 주님을 사랑합니다. 당신은 저의 주인이십니다. 저는 교회를 사랑하고 성도들을 사랑합니다. 저는 특별히 열 살에서 열다섯 살까지의 어린 소녀들을 사랑합니다. 저는 단순히 그들을 사랑합니다. 주여, 저는 자유롭게 떠나고 싶지 않습니다. 오, 주여, 저를 다루소서." 어떤 젊은 자매는 주님께 다룸을 받기 위해 이렇게 사흘 밤을 보낼지도 모른다. 주님께 철저히 다룸을 받은 후에 그녀는 "주님, 저를 불쌍히 여기시고 부담을 주소서."라고 하면서 구걸하는 방식으로 기도할 필요가 없다. 그녀는 다만 "주여, 당신의 은혜로 저는 어린 소녀들을 돌보기 위한 부담을 취합니다. 주여, 당신은 반드시 저와 함께 가셔야 합니다."라고 말할 수 있다. 그녀는 주님께 "주님, 제가 부담을 취했기 때문에 당신은 저와 함께 일하셔야 합니다."라고 요구할 수도 있다. 주님은 진실로 그 자매를 존중하시고 그 자매와 함께 가실 것이다.
모든 형제자매들이 이러한 부담을 취해야 한다. 예를 들면 나이 든 자매들은 나이 많은 성도들을 돌보는 부담을 취할 수 있다. 어느 누구도 우리를 이런 봉사에 지정해 주지는 않는다. 우리는 모두 몸의 머리이신 주님께 나아가서 그분께 철저한 다룸을 받아야 한다. 부담에는 여러 범주가 있다. 나의 관찰에 의하면, 돌봄이 필요한 많은 사람들이 여전히 방치되어 있고, 유용한 사람들은 이러한 필요를 채울 수 있어야 한다. 나를 비롯하여 인도하는 형제들은 "자매님, 이 일을 하십시오."라고 말할 수 없다. 그것은 결코 통하지 않는다. 그 대신 우리는 모두 주님께 나아가서 주님의 철저한 다룸을 받아야 하고, 돌봄이 필요한 곳을 볼 수 있도록 영적인 눈이 열려야 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떠한 야심도 없이 우리의 온 생애를 희생하더라도 부담을 취할 것이고, 우리가 취한 부담은 무엇이든지 주님의 뜻일 것이다. 그것은 우리의 생명까지도 드릴 가치가 있는 것이다. 나는 열아홉 살 때 구원받았다. 그날 나는 주님께 "주여, 당신께서 저에게 온 세상을 주신다 하더라도 저는 거절합니다. 저는 단순히 주 예수님을 위하여 가난해지기 원합니다."라고 말했다. 만약 젊은 자매들이 이렇게 한다면 그들은 주님의 축복을 볼 것이다. 우리는 모두 사람들을 돌보기 위한 부담을 취해야 한다. 이것 이외에 주님의 갈망을 수행하는 다른 길은 없다.
사람들에게 관심을 갖기를 배움
주님께 철저히 다룸을 받고 부담을 취한 후에 우리는 사람들에게 관심을 갖기를 배워야만 한다. 타락 때문에 우리 중 많은 사람이 다른 사람들에게 관심이 없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이 천국에 가든지 지옥에 가든지 이것은 당사자의 문제라고 여긴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의 생명이 자라는지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고 자신의 영적 복리만을 관심하는 것으로 충분하다고 느낀다. 그러나 교회의 봉사는 우리 모두가 다른 사람들과 관계를 갖기를 요구한다. 우리는 주님의 백성에게 관심을 가져야 한다. 이 관심을 우리는 음식 맛에 비유할 수 있다. 많은 중국 사람들이 중국 음식에 관심을 갖고 있고 차이나타운에 가는 것을 좋아한다. 그러나 우리는 주님의 백성에게 관심을 가질 필요가 있다. 매일 주님의 백성이 우리의 '음식'이 되어야 한다(요 4:31-34). 좀 더 나이 많은 십대 자매들은 이렇게 말해야 한다. "교회 생활 안에서 열 살부터 열다섯 살까지의 어린 자매들은 모두 나의 음식입니다. 나는 이 정도로 어린 사람들에게 관심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타고난 방식으로 사람들에게 관심을 가져서는 안 된다. 어떤 사람들은 이야기를 하거나 한담하는 것을 좋아하는 성향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합당한 방식으로 사람에게 관심을 갖는 것이 아니다. 젊은 사람들은 결혼에 대해 말하기를 좋아하고, 나이가 많은 사람들은 아이들과 손자들과 사위나 며느리 등에 대해 물어보기를 좋아한다. 우리는 이런 종류의 잡담은 잊어버려야 한다. 그것은 타고난 방식이며 사교적인 방식이다. 그보다 우리는 반드시 생명의 방식으로 사람들에게 관심을 두어야 한다. 우리는 사람들의 결혼이나 시댁 식구 혹은 처가 식구나 다른 문제들에 대해 질문하기를 좋아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오직 생명만을 관심한다. 우리는 이것에 대해 기도해야 하고, 어떤 사람들은 금식하며 기도해야 한다. 우리는 "주여, 저는 태어나면서부터 타고난 방식으로 사람들에게 이야기하기를 좋아합니다."라고 기도할 수도 있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주여, 저는 원래 사람들에게 말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저는 형제들을 사랑합니다. 그리고 저는 교회 안에 십 년 동안 있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까지 아무에게도 저 자신을 열고 싶지 않습니다."라고 기도할 수도 있다. 우리는 모두 이렇게 기도해야 한다. “주여, 저에게 부담을 주소서, 저는 타고난 방식이나 사교적인 방식이 아닌 생명의 방식으로 당신의 사랑하는 성도들에게 깊은 관심을 갖고 그들과 관계를 갖기를 원합니다. 주여, 저는 저의 생명을 희생하는 것이 대가라 할지라도 기꺼이 치르겠습니다. 저는 이 사람들을 사랑하고 그들을 위해 죽기까지 하겠습니다. 저는 그들이 구원받고 생명 안에서 자라며 성숙되는 것을 보기 원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떤 특정한 사람들에 대한 부담을 취할 수 있다. 우리는 그들의 명단을 만들어 항상 지니고 있어야 하며 그들 한 사람 한 사람을 위해 기도해야 한다. 십대의 자매는 “주여, 이 사람은 아직도 구원받지 않았습니다. 주여, 저는 그녀가 구원받기까지 결코 편할 수 없습니다. 저를 위해서라도 주님께서 그녀를 구원하셔야 합니다.”라고 기도할지도 모른다. 우리는 지나치게 영적이어서 “주여, 그녀를 구원하는 것은 저를 위한 것이 아닙니다.”라고 말할지 모른다. 그러나 주님은 “네가 이 사람에 대해 참된 부담을 갖고 있기 때문에 나는 너를 위하여 그녀를 구원할 것이다.”라고 말씀하실지 모른다. 결국 그 자매는 그 소녀가 구원받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이후에 그 자매는 “주여, 이 소녀가 지금 구원받았습니다. 그러나 그 소녀는 아직 당신을 사랑하지 않습니다. 저는 그녀의 현 상태에 결코 만족할 수 없습니다. 주여, 이 소녀 안에서 무언가를 이루소서. 제가 당신을 사랑하는 것처럼 이 소녀도 당신을 사랑하게 하소서.”라고 말할 것이다. 또다시 그 자매는 주님께서 그녀의 기도에 응답하시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이와 같이 나이 많은 세대는 반드시 같은 방식으로 부담을 취하고 기도해야 한다. 우리는 사람들에게 관심을 갖고 그 사람들과 관계를 가져야 한다. 그런 후 우리는 부담을 취할 수 있다. 교회 안에 있는 많은 사람들에게는 그들을 짊어질 어깨가 필요하고 그들을 감싸 안을 가슴이 필요하다(출 28:9-12, 15-21, 29). 우리는 그들을 사랑해야 한다. 그들이 넘어졌을 때 우리는 울어야 하고, 그들이 일어설 때 우리는 기뻐해야 한다. 우리는 그들을 짊어져야 한다. 우리의 봉사는 단지 의자를 정리하고 청소하며 안내하고 사무적인 일을 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이런 모든 일은 우리가 사람들을 돌보기 위한 수단과 도구와 연결 통로이며 일시적인 것이다. 우리 모두는 주님께 나아가서 기도하고 이러한 부담을 취해야 한다.
사람들을 돌보려는 사랑의 마음을 가짐
우리는 인수를 증가시키기 위해서 많은 방법을 시도했으나 거의 대부분이 효과가 없었다. 최근에 우리는 매주 집회에서 복음을 전하는 실행을 성도들이 자기 가정에서 복음을 전하는 실행으로 바꾸었다. 그러나 거의 대부분의 성도가 복음을 위해서 자신의 가정을 열지 않았다. 이것 때문에 나는 주님 앞에서 더 많이 근심했다. 우리가 사람들을 돌보지 않고 그들에게 관심을 갖지 않는다면 어떤 방법도 통하지 않는다. 그러나 만약 우리가 그들에게 관심을 갖는다면 이 관심 자체가 길을 열어 줄 것이다. 우리는 길이 없다고 말하거나 아무도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라고 말해서는 안 된다. 중국의 닫혀 있던 많은 문조차도 결국에는 열렸고 수많은 사람이 구원받았다. 중국에서의 일은 처음에 아주 어려웠다. 한 선교사가 마을을 방문했을 때 아무도 문을 열어 주려고 하지 않았다. 아이들은 심지어 그에게 돌과 진흙을 던지기까지 했다. 그래도 그는 도망가지 않았다. 그는 가만히 서서 주위를 돌아보고는 “감사합니다. 이 정도면 충분합니다.”라고 말했다. 그 형제가 사람들에 대해 가졌던 사랑과 인내가 결국 사람들의 마음을 감동시켰다. 중국의 모든 마을에서 복음을 전하는 길은 어려웠다. 만약 그가 그런 곳에는 갈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면 길은 없었을 것이다.
만약 우리에게 사람들에 대한 부담과 관심과 흥미가 있었다면 지난 몇 달 동안 우리는 백 명을 데려올 수 있었을 것이다. 어떤 사람들이 복음 집회에 사람을 데려오기가 너무나 힘들다고 말했기 때문에 우리는 성도들이 그들의 가정에서 복음을 전하도록 했다. 그러나 결국 가정에서도 복음을 전하지 않았다. 우리에게 방법이 부족한 것이 아니라 마음이 부족한 것이다.
…우리는 어떤 상황에서도 길이 없다고 말해서는 안 된다. 모든 것이 우리 마음에 달려 있다. 원칙적으로는 이 땅에서 가장 현대적인 국가인 미국의 현재 상황도 중국의 옛 상황과 똑같다. 그 당시의 마귀는 옛 뱀이었지만 오늘날에는 더 현대적이다. 동일한 뱀이 사람들을 주님에게서 멀어지게 하려고 여러 가지 방법을 사용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람들을 위해 기도하는 영과 사랑하고 돌보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 우리가 사람들을 위해 이러한 마음과 강화된 관심을 갖는다면 길은 열릴 것이다.(교회의 건축을 위해 열매를 맺고 목양하는 정상적인 길 22-42쪽)

그대는 청년의 정욕을 피하고 순수한 마음으로 주님을 부르는 사람들과 함께 의와 믿음과 사랑과 화평을 추구하십시오. 딤후 2:22

![]() |
![]() |